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려 말 왜구의 침입 (문단 편집) === 1375년, 우왕의 즉위와 왜구의 공세 === 어려운 상황에서 즉위한 우왕은 즉위와 동시에 왜구에게 계속해서 공격을 당했다. 즉위한 바로 그 해인 1374년 12월에 밀양이 공격 당한 후 즉위 원년인 1375년 1월에도 밀양이 재차 공격을 당한 것이다. 시간 순서를 생각해보면 사실상 12월부터 1월까지 계속 공격이 이어지던 것인데, 이에 지방의 만호들만으로는 도저히 막을 방법이 없어 장군 [[최인철]](崔仁哲)이 파견되었다. 그 이후 2월에 동지밀직(同知密直) 한방언(韓邦彦)을 양광도 부원수(副元帥) 겸 순문사(巡問使)로 임명했는데, '''임명하기가 무섭게''' 3월, 왜구가 경양현(慶陽縣)[* 지금의 [[아산시]]에 해당한다.]에 쳐들어와 한방언이 나가 싸웠으나 패전하고 말았다. 그런데 5월 경, 왜인 중에 [[등경광]](藤經光)이라는 인물이 갑자기 나타나 부하들을 이끌고 장차 공격해 올것이라고 하며 공갈을 치며 양식 등을 얻어내려 했고, 고려 조정에서 이를 주는 명목으로 투항 비스무리하게 순천(順天)ㆍ연기(燕岐) 등에 머물면서 관아에서 양식을 공급 받았다. 이때 전라도 도순문사(都巡問使)였던 [[김선치]](金先致)[* 그의 소지품이었던 [[벼루]]로 유명한 인물이다.]는 밀직부사(密直副使) [[김세우]](金世祐)의 말을 듣고 술자리를 열어 등경광 등을 초대한 다음, 이후 급습하여 그들을 죽이려 하였지만 작전이 누설되어 등경광 등은 도주했으며, 겨우 세 명만 잡아 죽였지만 김선치는 벌을 두려워해 70명을 죽였다고 구라를 치다가 걸려 유배되어 수졸(戍卒)이 되었다. 그런데 고려사 김선치 전이나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그 전까지 왜구가 침략을 해와도 가축이나 사람은 죽이지 않았지만 이 일로 앙심을 품어 부녀자나 어린 아이까지도 모두 죽였다고 서술되었는데, 이 항목에도 구구절절하게 설명이 되어 있듯 왜구가 사람을 죽이고 포로로 잡은 기록이 많은데 갑자기 나타난 엉뚱한 소리다. 아마도 김선치에 대해 기록하면서, 김선치 최대의 병크를 부각하다보니 들어간 서술로 보인다. 이후 8월에는 [[낙안군|낙안(樂安)]]에도 쳐들어왔다. 9월에는 왜구가 [[덕적도]]와 [[자연도]] 등지에 모여 개경이 위급했는데, 당시 [[김의(명나라)|김의]](金義) 등이 심왕(瀋王) 모자(母子)를 데리고 고려 북방 가까이 왔다는 소문이 있어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임견미]](林堅味) 등을 서경상원수(西京上元帥)로 삼아 대비하던 참이었다.[[http://db.history.go.kr/KOREA/item/level.do;jsessionid=E42556A5832084DFBBCDB8F1E0B527A3?levelId=kj_030r_0010_0020_0080_0050|#]] 그런 무렵에 갑자기 측면에서 왜구가 몰려오자 당황스러운 판국이었는데, 급하게 양광도와 전라도, 경상도 등에서 병력을 징발하고 [[이성계]]와 [[최영]]을 모두 파견해 동강과 서강에서 위세를 보임으로써 왜구의 침입을 막게 하였다. 그러는 사이에도 왜구는 현재의 [[충청남도]]의 [[천안시]], [[서산시]], [[홍성군]] 등을 공격해 왔다. 또한 12월에는 왜구가 양광도로 몰려왔기에,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 [[김사보]](金仕寶)를 병마사로 보내 이를 방어하게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